AI는 작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 파업이 만든 새로운 규칙
생성형 AI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영화와 방송 산업에서는 인공지능이 작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제작사는 AI를 이용해 비용을 줄이고 제작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AI 학습에 무단으로 사용되거나 AI가 작성한 대본을 수정하는 보조 인력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걱정한다.
2023년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WGA)은 이러한 문제를 포함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148일간 파업을 진행했다. Grohmann, Rocha와 Guilherme(2025)는 이 파업을 단순한 임금 협상이 아니라 노동자가 직접 AI의 사용 규칙을 결정한 ‘노동자 주도 AI 거버넌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분석했다.
정부와 기업 중심의 AI 규제
일반적으로 AI 거버넌스는 정부가 법률을 만들거나 기업이 윤리 원칙을 정하는 방식으로 논의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 작업 현장에서 AI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Grohmann과 공동 저자들(2025)은 노동자도 단체교섭, 파업, 캠페인과 사회적 연대를 통해 AI 사용 방식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주도 AI 거버넌스란 노동자가 AI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결정하고 거부할 권리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할리우드 작가들의 파업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작가들은 AI를 무조건 금지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AI가 인간 작가를 대체하거나 작가의 권리를 약화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요구했다.
파업 자료와 작가 인터뷰를 활용한 연구 방법
연구진은 2023년 5월부터 2024년 5월까지 WGA 파업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했다. 공식 파업 홈페이지와 단체협약, 관련 뉴스 기사 42건, WGA의 인스타그램 게시물 75건과 X 게시물 127건을 분석했다. 또한 조합의 역사와 과거 기술 변화에 대한 대응을 보여주는 기록 자료도 살펴봤다.
연구진은 파업을 조직한 핵심 관계자 4명이 참여한 약 2시간 분량의 온라인 대담과 후속 심층 인터뷰도 분석했다. 인터뷰에서는 WGA 내부에서 AI 문제를 어떻게 논의했는지, 협상 목표를 어떻게 정했는지, 소셜미디어와 슬로건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파업이 다른 국가와 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조사했다.
수집된 자료는 노동자의 힘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 ‘권력자원 접근법’에 따라 분석됐다. 그 세 가지는 제도적 권력, 구조적 권력, 담론적 권력이다.
오랜 노동운동에서 축적된 제도적 권력
WGA가 AI 문제를 협상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배경은 오랜 시간 축적된 제도적 권력이었다. 할리우드 작가들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노동조건과 수익 배분 문제를 두고 제작사와 협상해 왔다.
과거에는 TV 재방송, 비디오테이프, DVD, 인터넷 배급과 스트리밍이 주요 쟁점이었다. 새로운 유통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제작사는 기존 계약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수익을 얻었고, 작가들은 그 수익에서 자신의 몫을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 했다.
2023년 파업 역시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었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했지만, 작가들은 작품의 실제 성과에 따른 적절한 잔여 보상과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생성형 AI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로 등장했다.
따라서 이번 AI 협상은 갑자기 만들어진 대응이 아니었다. 과거 기술 변화에 맞서 협상해 온 경험과 단체협약 제도,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 제작을 멈추게 한 구조적 권력
구조적 권력이란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용해 사업 활동을 중단시키거나 기업의 수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작가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의 출발점에 위치한다. 대본이 없으면 배우와 감독, 촬영팀이 있어도 새로운 작품을 정상적으로 제작하기 어렵다. WGA 작가들이 작업을 중단하자 주요 스튜디오와 스트리밍 플랫폼의 영화와 시리즈 제작이 연기되거나 중단됐다. 방송사의 토크쇼도 제작에 차질을 빚었다.
논문에 따르면 이 파업이 여러 산업에 발생시킨 경제적 손실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됐다. 작가들은 자신들이 제작 과정의 핵심 노동자라는 사실을 이용해 제작사와 플랫폼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작가들이 우려한 것은 AI가 모든 작가를 즉시 대체하는 상황만이 아니었다. 제작사가 AI로 초안을 만든 다음 인간 작가에게 낮은 보수를 주고 이를 수정하게 만들 가능성도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작가는 창작자가 아니라 AI가 만든 결과물을 검토하는 보조 인력으로 전락할 수 있다.
AI 사용을 제한하는 새로운 단체협약
2023년 10월 비준된 WGA와 영화·TV제작자연맹(AMPTP)의 협약에는 생성형 AI에 관한 구체적인 보호 조항이 포함됐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AI는 문학적 저작물을 작성하거나 다시 쓴 작가로 인정될 수 없다.
- AI가 생성한 자료를 이용해 인간 작가의 크레딧과 권리를 축소할 수 없다.
- 제작사는 작가에게 업무상 AI 사용을 강요할 수 없다.
- 작가는 회사의 동의를 얻어 AI 도구를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제작사는 작가에게 제공한 자료가 AI로 생성됐는지 공개해야 한다.
- 작가의 저작물을 AI 학습에 사용하는 행위가 기존 협약이나 법률을 위반할 경우 이를 금지할 수 있다.
이 조항들은 AI 기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AI가 작가의 업무와 권리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계약으로 규정한다. 작가가 원하는 경우 AI를 연구나 아이디어 개발에 활용할 수 있지만, 제작사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를 강제로 사용하거나 인간의 창작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협약은 정부가 만든 법률이나 기술기업이 발표한 자율적인 윤리 원칙이 아니다. 실제 작업 현장의 노동자들이 파업과 교섭을 통해 만들어낸 강제력 있는 규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AI는 예술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의 힘
연구가 특히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은 담론적 권력이다. 담론적 권력이란 노동자가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대중과 미디어의 지지를 끌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WGA는 파업 기간에 “AI는 예술이 아니다”, “AI에는 영혼이 없다”와 같은 슬로건을 사용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복잡한 AI 기술과 노동 문제를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전달했다.
작가들은 AI 문제를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저항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구에게 기술을 통제할 권한이 있는지, AI가 누구의 작업으로 학습하는지, 기술의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를 질문했다.
파업에 참여한 작가들은 AI가 인간의 경험을 실제로 살아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상실, 출산, 기쁨과 차별 같은 경험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 AI는 이러한 경험을 직접 느끼지 못한 채 기존 창작자의 작품을 데이터로 이용해 결과물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영화와 드라마를 즐기는 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작가들은 소셜미디어, 라이브 방송, 언론 인터뷰와 창의적인 거리 시위를 활용해 파업의 이유를 알렸다. 유명 배우와 감독뿐만 아니라 일반 시청자와 다른 산업의 노동자도 연대에 참여했다.
창작자의 일자리를 넘어선 문화적 문제
작가들은 생성형 AI가 다양성과 재현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I는 기존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과거 영화와 방송에서 반복된 인종·성별·계층의 불균형을 그대로 재생산할 가능성이 있다.
기존 할리우드 작품이 백인 남성 중심의 관점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작품을 중심으로 학습한 AI도 비슷한 이야기와 인물을 반복할 수 있다. 그 결과 흑인, 라틴계, 성소수자, 장애인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 작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AI가 과거 자료를 조합해 대본을 생산한다면, 영화 산업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목소리와 경험을 발견할 기회는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AI 규제는 일자리 보호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제작될 것인지 결정하는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
기술 거부가 아닌 사용 조건의 협상
WGA의 주장은 AI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들은 이미 영화 제작 과정에서 다양한 AI 기술과 디지털 도구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 누가 사용 조건을 결정하느냐는 점이었다.
AI가 작가의 연구와 아이디어 개발을 돕는 도구라면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작사가 AI를 작가의 임금과 인력을 줄이는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기존 작품을 허가 없이 학습 데이터로 이용한다면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파업의 핵심은 인간과 AI의 단순한 대결이 아니다. 기술이 인간의 창작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것인지, 아니면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고 노동자의 권한을 약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인지에 관한 권력 다툼이었다.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할리우드 모델
Grohmann과 공동 저자들(2025)은 WGA의 성공을 다른 산업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한다. 할리우드 작가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 노동조합, 단체협약, 세계적인 문화적 영향력과 높은 언론 노출을 확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작업을 멈춰 거대한 제작 산업에 직접적인 손실을 줄 수 있었다.
반면 노동조합이 없거나 생산 중단을 통해 기업에 압력을 가하기 어려운 노동자는 같은 방식으로 AI 사용 조건을 협상하기 어렵다. 대중의 관심을 받기 힘든 직종은 담론적 권력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제도적 권력은 오랜 노동운동의 역사가 필요하고, 구조적 권력은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담론적 권력 역시 사회적 관심과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 주도 AI 거버넌스는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힘이 결합될 때 가능하다.
노동자가 직접 만드는 AI 규칙
2023년 할리우드 작가 파업은 노동자가 AI 때문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작가들은 기술이 발전하기를 기다렸다가 피해에 대응하는 대신, AI가 작업 현장에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사용 규칙을 협상했다.
그들이 확보한 결과는 세 가지 힘이 결합한 결과였다. 과거 노동운동에서 축적된 제도적 권력, 영화와 방송 제작을 중단시킬 수 있는 구조적 권력, 그리고 AI를 노동과 문화의 문제로 설명해 대중의 지지를 얻은 담론적 권력이 함께 작동했다.
이 사례는 AI 규제가 정부와 기술기업만의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AI로 직접 영향을 받는 노동자가 기술의 도입과 사용 조건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AI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AI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그 규칙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Citation
Grohmann, R., Rocha, A. C., & Guilherme, G. (2025). Worker-led AI governance: Hollywood writers’ strikes and the worker power. Information, Communication & Society, 1–20. https://doi.org/10.1080/1369118X.2025.2521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