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유럽 점령 : 알고리즘의 민낯
넷플릭스는 유럽의 이야기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넷플릭스는 세계 각국에서 현지 콘텐츠 제작을 확대하며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투자가 단순히 유럽 콘텐츠의 제작 편수를 늘리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의 제작 모델과 콘텐츠 전략은 유럽 창작자들의 작업 방식은 물론, 이야기의 구성과 문화적 표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Idiz(2024)는 넷플릭스와 작업한 경험이 있는 유럽의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쇼러너들의 인터뷰를 통해 넷플릭스가 유럽의 제작 문화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넷플릭스가 새로운 제작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미국식 제작 모델과 데이터 중심의 판단 기준을 유럽 콘텐츠에 이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 5개국 제작자들이 경험한 넷플릭스
이 연구는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덴마크, 스페인의 텔레비전 및 영화 산업 종사자 1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반구조화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다. 연구 참여자들은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쇼러너 등 넷플릭스 콘텐츠 제작에 직접 참여한 전문가들이다.
기존 연구들은 넷플릭스의 제작 방식이 전통적인 미국 방송사나 HBO의 제작 관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Idiz는 미국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넷플릭스가 유럽 시장에 진출하면서 현지 제작자들은 기존 공영방송이나 유럽식 공동 제작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제작 구조와 피드백 방식을 접하게 되었다.
유럽에 들어온 미국식 제작 모델
유럽의 텔레비전 제작은 전통적으로 공영방송과 국가 간 공동 제작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국가별 문화와 공공적 가치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으며, 미국에서 일반적인 쇼러너 중심 제작 방식이나 대규모 작가실은 일부 유럽 국가를 제외하면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유럽 현지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미국식 작가실과 쇼러너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유럽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협업 기회와 제작 경험을 제공했지만, 기존의 현지 제작 문화와 충돌하기도 했다.
넷플릭스는 현지 제작팀과 계약하지만 콘텐츠의 개발 방향, 이야기 구성, 캐릭터 설정 등에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겉으로는 현지 창작자에게 상당한 자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제작 과정에서는 넷플릭스 임원과 콘텐츠 담당자의 판단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지 콘텐츠와 글로벌 콘텐츠 사이의 모순
넷플릭스는 일반적으로 “현지를 위한 현지 콘텐츠”를 제작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연구 참여자들도 넷플릭스로부터 우선 현지 시청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전달되는 의견은 이러한 원칙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정 농담이나 문화적 표현이 외국 시청자에게 이해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정을 요구받거나, 미국 시청자가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을 조정하라는 피드백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처럼 넷플릭스의 유럽 콘텐츠는 현지성과 초국가성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현지 시청자에게는 친숙해야 하지만, 다른 국가의 시청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결과 문화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표현이 약화되고, 세계 어느 시장에서도 무리 없이 소비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변할 가능성이 생긴다.
넷플릭스가 유럽 콘텐츠 제작을 확대하더라도, 그 콘텐츠가 반드시 유럽의 문화적 다양성을 강화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데이터는 창작 과정에 어떻게 들어오는가
넷플릭스는 공식적으로 데이터가 창작자의 결정을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연구 참여자들 역시 넷플릭스의 모든 피드백이 명시적으로 데이터를 근거로 제시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많은 의견이 일반 방송사 임원의 피드백과 비슷하거나 담당자의 직감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피드백 내용을 살펴보면 시청자 및 성과 데이터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Idiz는 넷플릭스가 창작자에게 제공하는 의견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콘텐츠의 문화적 특수성과 목표 시청자를 조정하는 ‘지역성 의견’이다. 두 번째는 여러 국가에서 콘텐츠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표현을 조정하는 ‘초국가적 의견’이다. 세 번째는 첫 번째 에피소드와 초반 시청 지속률에 집중하는 ‘파일럿 의견’이다. 마지막은 다른 기기를 함께 사용하는 시청자를 고려한 ‘세컨드 스크린 의견’이다.
시청자를 붙잡아야 하는 첫 15분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넷플릭스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초반부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와 쇼러너들은 넷플릭스가 첫 2분, 7분, 15분을 시청자 이탈이 발생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창작자들은 첫 15분 안에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과 정보를 배치해야 한다. 이야기의 분위기와 캐릭터를 천천히 구축하기보다 초반부터 갈등이나 강한 장면을 제시해야 하는 압박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 초반에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원칙은 넷플릭스만의 발명은 아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이를 시청 데이터와 결합해 더욱 세분화된 제작 기준으로 만든다. 그 결과 창작자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플랫폼의 시청 지속 전략에 맞춰 조정될 수 있다.
‘보여주기’에서 ‘보여주며 말하기’로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는 ‘세컨드 스크린 쇼’다. 이는 시청자가 넷플릭스를 보면서 동시에 휴대전화나 소셜미디어를 사용할 가능성을 고려해 제작되는 콘텐츠를 의미한다.
이러한 콘텐츠에서는 시청자가 계속 화면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대사, 내레이션, 음악, 보이스오버 등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반복적으로 전달하게 된다.
전통적인 시나리오 작법에서는 행동과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원칙이 강조된다. 그러나 세컨드 스크린을 고려한 콘텐츠에서는 이 원칙이 “보여주면서 동시에 말하라”로 바뀐다.
이는 시청자의 변화된 미디어 이용 습관이 단순히 콘텐츠 소비 방식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의 구조와 표현 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기회인가, 새로운 표준화인가
넷플릭스의 유럽 투자는 제작자들에게 더 많은 자금과 글로벌 배급의 기회를 제공했다. 현지 콘텐츠가 국경을 넘어 소개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에는 새로운 권력관계가 함께 따라온다.
넷플릭스는 시청 데이터, 콘텐츠 성과, 구독자의 취향에 관한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유한다. 반면 현지 제작자와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충분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 콘텐츠의 지식재산권과 장기적인 수익 역시 넷플릭스가 확보하는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제작자들이 넷플릭스가 선호하는 장르와 이야기 구조에 맞춰 작품을 기획하게 될 가능성이다. 위험한 실험보다 이미 성공이 검증된 장르와 형식을 반복한다면, 현지 콘텐츠의 양은 늘어나더라도 창작의 다양성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현지성을 다시 질문해야 한다
Idiz의 연구는 스트리밍 제작 문화가 전통적인 방송 제작의 단순한 연장선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넷플릭스는 미국식 제작 모델, 데이터에 기반한 시청자 분석, 글로벌 배급 전략을 결합해 유럽의 제작 관행을 새롭게 재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콘텐츠는 완전히 현지적이지도, 완전히 글로벌하지도 않은 혼합된 형태를 가진다. 현지 언어와 배우, 지역적 배경을 사용하지만 이야기의 구성과 표현은 글로벌 플랫폼의 기준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따라서 넷플릭스의 현지 제작 확대를 문화 다양성의 증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유럽 콘텐츠가 제작되는지가 아니라, 누가 콘텐츠의 방향을 결정하고 어떤 문화적 목소리가 최종적으로 남는가이다.
넷플릭스가 유럽의 이야기를 세계에 전달하는 통로인지, 아니면 유럽의 이야기를 플랫폼에 적합한 형태로 표준화하는 주체인지는 앞으로도 계속 검토해야 할 문제다.
Citation
Idiz, D. R. (2024). Local production for global streamers: How Netflix shapes European production cultures.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18, 2129–2148. https://ijoc.org/index.php/ijoc/article/view/21881